함열남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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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세 분야별 인물
독립운동가1 무궁화의 사람 억(檍)

公은 세보상(世譜上) 30世이시며 1863年 서울 왜송골에서 아버지 중추도사(中樞都事) 諱 영(泳)과 어머니 덕수 이씨(德水 李氏)의 12남매(男妹) 中 외아들로 출생(出生)하였다. 字는 치만(致萬), 號는 한서(翰西)이시다. 홀어머니 밑에서 가난하게 자랐으나 학업(學業)에 대한 열정(熱情)과 큰 꿈은 버릴 수 없었다.

1. 관력(官曆)

1884年(高宗21年)에 영어(英語) 학교(學校)인 동문학(同文學)을 수료(修了)하고 총해관(總海關)의 견습생(見習生)으로 있다가 1886年 내부주사(內部主事)가 되었다. 1887年 전권대신(全權大臣) 조 민희(趙 民熙)의 수행서기관(隨行書記官)으로 영국,러시아,독일의 순방(巡訪)하고 돌아와 궁내부별군직(宮內府別軍職)을 거쳐 1893年에는 칠곡 군수(漆谷 郡守)를 지내셨다. 1894年 갑오경장(甲午更張) 내각(內閣)에 내부토목국장으로 중용(重用)되어 서울 종로(鐘路)와 정동(貞洞)일대 및 육조 앞과 남대문 사이의 도로(道路)를 정비(整備)하는 동시(同時)에 파고다공원을 세웠다.

2. 독립(獨立),애국(愛國) 계몽운동(啓蒙運動)

1896年 2月 아관파천(俄館播遷) 後에 관직(官職)을 사임(辭任)하고, 그해 7月 서재필(徐載弼),이상재(李商在)등과 함께 독립협회(獨立協會)를 창립(創立)하여 중앙위원,서기 사법위원,평의원 등에 선출(選出)되고 고위지도자(高位指導者)로 활동(活動)하였으며,독립협회(獨立協會)의 기관지(機關紙)인 《대조선독립협회회보》의 발행(發行)에도 참가(參加)하였다.

1898년 9月 나수연(羅壽淵), 유 긍等과 함께 황성신문(皇城新聞)을 창간(創刊)하고 사장(社長)에 취임(就任)하여 국민(國民)을 계몽(啓蒙)하고 독립협회(獨立協會)의 활동(活動)을 적극(積極) 지원(支援)하였다.

대한제국(大韓帝國)의 정치체제(政治體制)를 전제군주제(專制君主制)로부터 입헌군주제(立憲君主制)로 개혁(改革)하여 의회(議會)를 설립(設立)하고 대대적(大大的) 개혁(改革)을 단행(斷行)하려는 독립협회운동의 지도자(指導者)로 활동(活動)하다가, 1898年1月에 17명의 지도자(指導者)와 함께 붙잡혔다.독립협회(獨立協會)가 해산(解散) 當한 뒤 1900年 7월 황성신문(皇城新聞)에 러시아와 일본(日本)의 한국분할설(韓國分割說)을 외국신문에서 옮겨 실어, 러시아와 일본의 한국침략야욕을 폭로(暴露)하고 경각심(警覺心)을 촉구(促求)하는 논평(論評)을 실었다가 경무청에 구금(拘禁)되었다.

또한,1902년 5월 《황성신문》에 일본이 갑오년(1894年) 동학운동 이래(以來) 우리나라를 침략(侵略)해 들어오면서 러시아와 맺은 러일협정의 침략적 성격(性格)을 논박(論駁)한 사설(社說)을 실었다가,총무 나수연과 함께 다시 경무청에 구속(拘束)되어 심한 고문(拷問)을 받고 4개월 만에 석방(釋放)되었다. 1903年 영관(領官)을 지낸 유동근이 황성신문(皇城新聞)의 사장(社長) 남궁 억(南宮 檍)과 총무(總務) 나 수연이 일본(日本)에 망명(亡命)해 있는 박 영효(朴 泳孝) 등과 공모(共謨)하여 의병(義兵)을 일으키기로 하였다고 모함(謀陷)하여 다시 경무청(警務廳)에 구속(拘束)되어 심한 고문을 받고 4개월(四個月) 뒤에 석방(釋放)되었다. 출옥(出獄)한 뒤 황성신문(皇城新聞) 사장직(社長職)을 사임(辭任)하였다.

1905년 3월 고종(高宗)의 간곡(懇曲)한 요구(要求)로 다시 관직(官職)을 맡아 성주목사(星州牧使)로 부임(赴任)하여 선정(善政)을 베풀었으나, 일본이 1905년 11월 무력(武力)으로 위협(威脅)하여 을사조약(乙巳條約)을 강제(强制)로 체결(締結)하고 국권(國權)을 박탈(剝奪)하자 통분(痛憤)하여 職을 사임(辭任)하고 또다시 귀경(歸京)하였다. 그러나 그 이듬해인 1906年 2月에 다시 양양군수(襄陽郡守)에 임명(任命)되자 애국계몽운동(愛國啓蒙運動)에 참가(參加) 하여 1907年 7月에 양양(襄陽)의 뒷산에 현산학교(峴山學校)를 설립(設立)하고 구국교육(求國敎育)을 실시(實施)하였다. 1907年 일본이 헤이그 특사사건(特使事件)을 구실로 고종(高宗)을 강제(强制)로 양위(讓位)시키고 정미 칠조약(丁未 七條約)을 체결(締結)하여 침략전쟁(侵略戰爭)을 강화(强化)하자 또 다시 관직(官職)을 사임(辭任)하고 상경(上京)하였다.

1907年 11月 권 동진, 여 병현, 유 근, 이 우영, 오 세창, 윤 효정, 장 지연, 정 운복, 홍 필주,등과 함께 대한협회(大韓協會)를 창립(創立)하고 회장(會長)이 되어 애국계몽운동을 전개(展開)하였으며 그 기관지로 《대한협회월보》와 《대한민보》를 발행하였다. 1908년 4월 강원도지방의 애국계몽운동단체로 《관동학회》를 창립(創立)하여 회장(會長)으로 활동(活動)하였으며 교육구국운동 잡지로서 《교육월보》를 발행(發行)하였다. 1910년8월 일본이 우리나라를 병합(倂合)하자 새 세대교육의 현장(現場)에 뛰어들어야 한다고 생각하여 그 해10월 배화학당(培花學堂)의 교사(敎師)가 되었고, 1912년 상동청년학원(尙洞靑年學院)의 원장(院長)을 겸하면서 독립사상(獨立思想)을 고취(鼓吹)시키고,

3. 낙 향(落鄕)

1918年 건강(健康)이 악화(惡化)되어 친지(親知)들의 권고(勸告)에 따라 선조(先祖)의 고향(故鄕)인 강원도 홍천군 서면 보리울에 낙향(落鄕)하여 1919年 9月에 모곡학교를 설립(設立)하였다. 모곡학교에 무궁화묘포(無窮花苗圃)를 만들어 나라꽃인 무궁화의 보급운동(補給運動)을 전국에 걸쳐 전개(展開) 하였다.
또한 애국적(愛國的) 찬송가(讚頌歌)를 만들어 전국(全國)의 교회(敎會)와 기독교계(基督敎係) 학교(學校)에 보급(補給)하였다. 1933年 11月 기독교계열(基督敎系列) 독립운동(獨立運動)의 비밀결사조직(秘密決死組織)인 십자가당(十字架當)을 조직(조직)하여 활동(활동)하다가 일본경찰(日本警察)에 붙잡혀 8개월간 투옥(投獄) 되었다. 노령(老齡)이 참작(參酌)되어 석방(釋放)되었으나 일본경찰로부터 받은 잔혹(殘酷)한 고문(拷問)의 여독(餘毒)으로 별세(別世)하였다.
1977年에 건국훈장국민장(建國勳章國民章)에 추서(追敍)되었다.
저서(著書)로는《동사략 東史略》《조선이야기》《조선의노래》《기러기 》《무궁화 동산》등이 있다.

독립운동가2 신학박사 1호 혁(爀)

公은 세보상(世譜上) 31世이며 교리공 병편(校理公 丙編)에 속한다. 아버지 단(檀)씨와 어머니 풍천 임씨(豊川 任氏)의 2男 中 長男으로 1882年 5月16日에 서울에서 출생(出生)하셨다. 1900年에 배재학당(現 培材高)을 졸업하시고, 그 後 평양신학교에 재학(在學)하면서 비어드와 신학교 교재(敎材) 번역(飜譯)에 헌신(獻身)하고 1921年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뒤 미국에 유학(留學)하여 프린스턴 신학부에서 M.A학위를 받고 1925년에는 리치먼드 유니온 신학교 연구과(硏究科)를 수료(修了)하였다. 그 이듬해에는 26歲의 젊은 나이로 우리나라 최초(最初)의 신학박사(神學博士) 학위(學位)를 받았다. 귀국(歸國)하여 모교(母校)인 평양신학교의 신학교수(神學敎授)가 되고 목사(牧師) 안수(按手)도 받았으며 24년간 봉직(封職)하다가 일제(日制)의 신사참배(神社參拜) 반대(反對) 문제(問題)로 학교가 폐교(閉校)되니 1939년 상해(上海)로 망명(亡命)하여 독립운동(獨立運動)에 참여(參與)하였다.

독립운동을 하면서도 성경(聖經) 주석(註釋)에 전념(專念)하였으며 1946년 해방(解放)과 더불어 귀국(歸國)하여 기독교연합회 총무로 선교활동(宣敎活動)을 하고 기독교 방송국 설립(設立)을 위하여 노력(努力)하던 중 6.25 전쟁(戰爭)이 발발하여 동년(同年) 8月 3日에 공산군에게 납북(拉北)되어 그 곳에서 파란만장(波瀾萬丈)한 生을 마치시니 영영 고향(故鄕)땅을 밟지 못하셨다.부인(婦人)은 광산 김씨(光山 金氏)로 남편(男便)과 같이 사회운동(社會運動)과 선교활동(宣敎活動)에 기여(寄與) 한 바 크다.

슬하(膝下)에는 7男과 2女를 두었는데 곧 長男 요한(堯漢), 次男 요섭(堯攝),3男 요세(堯世),4男 요설(堯卨), 5男 요직(堯稷),6男 요백(堯伯),7男 요숙(堯叔)과 2女는 차광조와 정현웅(요안나氏의 夫君)씨이다.
2男 요섭의 세째 아들 건(鍵)씨는 북한(北韓) 외교통(外交通)으로 남북대화(南北對話)에 큰 활약(活躍)을 하였다.

독립운동가3 항일 언론인 훈(薰)

公은 세보상(世譜上) 31世이시며 대사성 무편(大司成 戊編)에 屬한다. 아버지 諱 계(棨)씨와 부인 해주 최씨(海州 崔氏)의 4男 中 長男으로 1865年 5月 17日 강화(江華)에서 출생(出生)하셨으며 字는 경순(耿淳)이고 號는 일우(一愚)이시다. 장성(長成)하면서 학업(學業)에 정진(精進)하시고 젊어서부터 사회운동(社會運動)의 선봉(先鋒)으로 활동(活動)하시고 중추원 의관(中樞院 議官)을 지냈으며 황성신문(皇城新聞)의 3代 사장으로 크게 공헌(供獻)하고 회양군수(淮陽郡守)에 재임(在任)하는 동안 선정(善政)을 베풀어 군민(郡民)들이 선정비(善政碑)를 세우기도 했다. 또한 강화 진위대(鎭衛隊)의 참령을 거친뒤 기호학회(畿湖學會) 총무(總務)로 있으면서 독립운동가(獨立運動家)인 이동휘(李東煇)씨와 특히 친밀(親密)하게 지냈으며 조선일보 3대 사장에 취임(就任)하여 그의 강직(强直)한 성품(性品)과 청족(淸族)의 자손(子孫)으로서 기개(氣槪)를 드러내기도 하였다.

1924年에는 조선일보사 판권(版權)이 신 석우(申 錫雨)씨에게 넘어가자 월남(月南) 이 상재(李 商在)선생에게 사장직(社長職)을 넘겨주고 조선교육회(朝鮮敎育會) 회장(會長)을 맡기도 하면서 서울 필운동에 은거(隱居)하다가 해방직전(解放直前)에 강화로 낙향(落鄕)하여 1946年에 향년(享年) 81歲로 타계(他界)하셨다. 부인(婦人) 전주 이씨(全州 李氏) 사이에 1男 벽(壁 : 시인)씨를 두셨으나 일찍 요절(夭折)하므로 조카 기(基)씨를 입양(入養)하여 代를 잇고 있다.

아래에 公과 조선일보(朝鮮日報)와의 얽힌 이야기를 소개(紹介)하기로 한다.

조선일보는 창간(創刊) 직후 극심(極甚)한 재정난(財政難)과 총독부(總督府)의 기사 탄압(記事 彈壓)에 시달렸다. 재정(財政)을 뒷받침할 수 있는 사주(社主)도 없었고 후원(後援)을 기대(期待)한 대정실업친목회와도 5개월 만에 결별(訣別)해 재정상태(財政狀態)는 말이 아니었다. 재정난으로 표류(漂流)하던 조선일보는 1921년 4월8일 송 병준(宋 秉晙)의 손에 넘어갔다.그는 “6000원의 헐가로 조선일보를 매수”(개벽 1924년10월)했다. 송 병준(宋 秉晙)은 이 완용(李 完用)과 더불어 매국(賣國)의 원흉(조선일보 1926년2월13일)으로 불리던 인물(人物)이다. 그는 처음엔 많은 이익을 붙여 조선일보를 다른 사람에게 다시 넘기려 했지만 여의치 않자 원로(元老) 언론인(言論人) 남궁 훈을 사장으로 영입(迎入)하기에 이른다. 남궁 훈은 당시 66세로 기개(氣槪)가 꼿꼿한 지사(志士)였다.그는 구한말 황성신문 사장을 지냈다. 1904년 이 신문이 경영난에 처하자 집문서를 저당(抵當) 잡혀 속간(續刊)시켰고, 1905년 장 지연의 유명한 논설(論說)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이 실린 신문(新聞)을 배부(配付)하며 목놓아 울기도 했다. 그는 이때를 회고(回顧)하며 “이날 신문을 배부하던 광경이 일생에 잊지 못할 일이며 민간신문을 성공(成功)시키지 못한 것이 일생(一生)에 유감(遺憾)” (조선일보 1932년1월6일) 이라고 했다.

남궁 훈은 송 병준의 거듭된 요청(要請)으로 사장직(社長職)을 맡으면서 두 가지 조건(條件)을 내세웠다.
첫째, 신문 제작(新聞 製作)에 한 자라도 용훼(용훼)하지 말 것.
둘째, 사원 채용(社員 採用)에 간섭(干涉)하지 말 것 등이었다. 그는 “범한테 물려가도 정신만 잃지 말라고 하는 말과 같이 누구 돈이든지 일만 정당(正當)하게 하면 된다”고 사장직을 수락(受諾)한 이유(理由)를 설명(說明)했다.(조선일보 1933년4월27일) 그는 조선일보가 "민중의 벗”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판권(版權)은 송 병준이 가졌지만 지면 제작(紙面 製作)과 인사(人事)에서 남궁 훈은 송 병준의 간섭(干涉)을 차단(遮斷)했다. 남궁 훈은 기존(旣存)의 이름뿐이었던 사장들과 달리 사장의 실질적(實質的)인 업무(業務)를 철저(徹底)하게 챙겼다. 그는 수표동 사옥 2층 온돌방 사장실에 보료를 깐 채 신문 대장(인쇄하기 전의 지면)을 직접 하나하나 꼼꼼하게 챙겼다. “대소사무를 총괄(總括)하여 처리함은 물론이거니와 영영세세한 기사(記事)에까지 첨삭(添削)을 행하야 무불간섭의 태도”(개벽 1923년7월)를 취한 것이었다. 그는 ‘보도 제일주의’를 주창(主唱)해 상해(上海) 임시정부(臨時政府)의 관련 기사도 과감(果敢)하게 앞장서서 보도(報道)했다. “그 때 상해(上海)에 임시정부(臨時政府)가 있어 그 소식, 그 자료(資料)를 어떻게 할까?(논란이 있었습니다)
나는 서슴지 않고 ‘보도’라고 했습니다. 보도! 한 신문으로서 기자(記者)의 직책(職責)으로서 다만 ‘보도’를 했다. 그 후에야 동아일보에서 서로 앞다투어 상해(上海) 임시정부 소식(消息)을 게재(揭載)하였다.”

다시 1920년대 초반 불이 붙기 시작한 조선인의 소작쟁의(小作爭議)에 대한 보도(報道)도 지시(指示)했다. 그는 “당국(當局)에서는 선동(煽動)을 한다는 등 여러 가지의 말이 있었다.”면서 “이역(또한) 중대한 사변이니까 다만 사실로서, 엄연한 사실로서 보도에 힘을 썼던 것” 이라고 말했다. 그는 전문 언론인(言論人)답게 활자(活字)를 바꾸고 지면(紙面)의 쇄신(刷新)을 加해 취임(就任) 당시 3000부이던 발행부수(發行部數)를 1만 5000부까지 끌어 올렸다. 1938年 조선일보 지령(紙齡) 6000호 기념호(記念號)는 이전 사장인 조 진태와 유 문환을 무시(無視)한 채 남궁 훈을 “조선일보 초대 사장”이라 적기도 했다.남궁 훈은 조선일보 사장으로 재직(在職)하는 동안 외아들을 잃는 아픔을 겪었다.

독립운동가4 현(炫)

전라남도 영광(靈光)에서 아버지 諱 의씨와 어머니 김해 김씨(金海 金氏)의 2男 中 長男으로 1901년4월18일 출생(出生)하여 보성전문학교(寶城專門學敎)를 졸업(卒業)하였다. 1919년 3월13일 전라 북도 전주(全州)에서 일어난 3.1운동 만세시위(萬世示威)때 남문(南門) 밖 장터에서 고형진,박태련 등과 함께 학생(學生), 시민(市民) 등 군중(群衆)들에게 태극기(太極旗)와 《독립 선언서》를 배포(配布)하고 시위(示威)를 주도(主導)하다가 일경(日警)붙잡혔다.
같은해 8월 2일 광주지방법원 전주지청(光州地方法院 全州支廳)에서 징역(懲役) 1년을 언도(言渡) 받았으며 같은 해 9월15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懲役) 6월을 선고(宣告) 받았는데 재판과정(裁判過程)에서 굽히지 않고 줄곧 법정투쟁(法庭鬪爭)을 전개(展開)하었다. 1927년 3월 조선청년동맹(朝鮮靑年同盟) 영광 청년회에 가입(加入)하여 활동(活動)하였고, 같은 해 10월 고려공산청년회(高麗共産靑年會)에 가입하여 민족해방투쟁(民族解放鬪爭)을 전개하다가 붙잡혀 1931년 12월 경성지방법원(京城地方法院)에서 징역 2년을 언도 받았다.

1932년 7월부터 1933년 1월 사이에는 영광군 법성면 법성리 자택(自宅)에서 정판갑과 함께 조기 건조사업(乾燥事業)을 하여 그 수익금(收益金)으로 희생(犧牲)된 독립운동가(獨立運動家) 가족(家族)들의 생계(生計)를 지원(支援)하는 조직(組織)을 설립(設立)하려다 사전(事前)에 발각(發覺)되어 붙잡혔다. 그리하여 1934년 7월 전주 지방법원(全州地方法院)에서 또다시 징역 2년을 언도 받았으며 같은 해 11월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2년이 확정(確定)되었다. 그 뒤 1939년 10월에도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또 다시 금고(禁錮) 8월을 언도 받았으며 1941년 3월19일 옥고(獄苦)의 여독(餘毒)으로 사망(死亡)하였다.

1986년 12월26일 건국포장(建國褒章)이 추서(追敍) 되었으며 (번호 486호), 대전국립묘지(大田國立墓地) 독립유공자묘역(獨立有功者墓域)에 이장(移葬)하여 안치(安置) 되었다. 유족(遺族)으로 아들 성(城)과 손자 신(臣)이 있으나, 아들은 출생 (39년1월27일) 1년여 만에 아버지를 잃은 것이다.

독립운동가5 태

公은 함열 남궁씨 세보상(世譜上) 32世로 지평공파 갑편(砥平公派 甲編)에 속한다. 아버지 혁(爀)公과 어머니 전주 이씨(全州 李氏)의 1男1女 中 長男으로 1920年 8月1日에 강원도 홍천군 서면 모곡리 976번지에서 출생(出生)하셨다.
1933年 춘천 보통학교(現 春川 初等學校)를 졸업(卒業)하고 춘천고등 보통학교(現 春川 高等學校)에 진학(進學)했다. 어릴 때부터 독립운동(獨立運動)의 거성(巨星) 한서(翰西) 남궁 억 선생에게 감화(感化)를 받아 배일 사상(排日 思想)이 투철(透徹)했던 그는 춘천고보 5학년이던 1937년9월 동급생(同級生) 이 찬우, 문 세현, 용 환각, 백 흥기, 조 규석, 성 수경과 함께 조선(朝鮮)의 독립(獨立)을 목적(目的)으로 하는 “상록회”를 조직(組織)하고 부회장(副會長)에 취임(就任)하였다.(회장은 조 규석) 이때 “상록회”의 강령(綱領)도 채택(採擇)하였는 바, 1. 회원으로서 자기완성 2.지도자로서 책임완수 3.단결력 배양으로 항일투쟁을 한다는 것이며, 회가(會歌)도 직접 작사(作詞)했다.
동시(同時)에 “상록회“의 활성화(活性化)와 동지 확보(同志 確保)를 위한 구체적(具體的)인 사업(事業)으로 독서회(讀書會)를 조직(組織)하여, 매월(每月) 월례회(월례회)때 독후감(독후감) 발표(발표)와 함께 현실 문제와 민족의 독립문제(독립문제)를 토론(토론) 하였다.또한 나라의 독립이 농촌의 자립(自立)을 통해 가능(可能)하다고 판단(判斷)하고, 적극적인 농촌계몽사업(農村啓蒙事業)도 전개(展開)하였다.

1938년 3월25일 춘천고를 졸업한 뒤 이 찬우,문 세현,백 흥기 등과 함께 만주(滿州) 길림(吉林)의 김 춘광 동지(同志)의 집으로 피신(避身)하였으며 그곳에서 《만주 상록회》를 조직(組織)하였고 자신은 하얼빈 지역책으로 만선일보 하얼빈 지사장(支社長)이 되어 ‘한인교회”를 통한 특수공작임무(特殊工作任務)를 부여(賦與) 받았다. 이리하여 1938년 9월에는 춘고의 “상록회”활동(活動)이 교외 청년들과도 연결(連結)되었으며 만주(滿州)로 간 졸업생들이 독립운동 지도자(指導者)들과 연결됨으로써 더욱 활발(活發)하게 전개(展開)되었다. 이렇듯 일경(日警)의 눈을 피해 지하활동(地下活動)을 전개하던 “상록회’ 의 장거는 1938년 말 일경에 탐지(探知)되어 관련자(關聯者) 137명이 검거(檢擧)되고 36명이 송치(送致)되는 비운(悲運)을 맞이했다. 1939년 12월27일에는 당시 경성지방법원 형사2부에 입건(入件)된 36명중 주모자(主謨者) 12명이 치안유지법(治安維持法) 1조 위반(違反)으로 2년 6월의 징역형(懲役刑)이 언도 되었다. 公께서는 왼쪽팔이 불구(不具)가 되는 어려움 속에 1941년 출옥(出獄) 후 다시 만주로 피신(避身)하여 “만선일보” 기자(記者)로 활동(活動)하다가, 1944年에 남궁 명호란 이름으로 춘천에 귀향(歸鄕)하였으나 1945년 7월 20일 재차(再次) 일경의 검거령(檢擧令)이 내려져 고향(故鄕)인 모곡의 산중(山中)으로 피신(避身)하였다. 1945년 8.15광복(光復)을 맞아 춘천으로 돌아와 건국준비위원회(建國準備委員會)에서 잠시 활약(活躍)하다가 같은해 10월 24일에는 강원일보의 전신(前身)인 ‘ 《팽오통신》을 창간(創刊)하였으며 11월 27일 제27호부터 《강원일보》로 제호(題號)를 바꾸었다. 이 때 발행인(發行人) 겸 편집인(編輯人), 편집국장(編輯局長)을 겸임(兼任)하였다.

1948년에는 서울의 평화신문사로 자리를 옮겨 집필활동(輯筆活動)을 하다가 1950년 6.25사변(事變)으로 다시 고향 모곡의 산중으로 피신하였으나 같은 해 9월 부락민(部落民)의 밀고(密告)로 후퇴(後退)하는 인민군(人民軍)에게 피납되어 북으로 끌려 가던 중 춘천시 우두동에서 인민군에 의해 총살(銃殺) 당했다 한다. 이 때 태씨의 나이 만 30세에 불과(不過)했다.(목격자 백 태호 사망. 생존했을시 110세)
유족(遺族)으로는 입양동생인 종(琮)씨가 춘천 후평동에 살고 있으며 부친(父親) 혁(爀)씨와 모친(母親) 전주 이씨(全州 李氏)는 아들의 소식(消息)을 애타게 기다리다가 1960年과 1974年에 각각 세상을 떠났다.

註 : 춘천고등보통학교(春川高等普通學校)의 상록회운동(常綠會運動)은 춘천지방 학생비밀결사운동(學生秘密決死運動)의 선구적(先驅的)인 것으로 이 지역 학생운동에 큰 영향(影響)을 미쳤다. 1967년 4월26일 제 43회 개교기념일(開校記念日)을 맞이하여 상록회활동(常綠會活動)을 기리기 위한 《상록탑》의 제막식(除幕式)을 가졌다.

독립운동가6 혁(焱)

公은 세보상(世譜上)으로 31世이시며 지평공파 병편(砥平公派 丙編)에 속하신다. 아버지 회(檜)씨의 3男으로 1900년 1월 27일 출생(出生)하여 어린 소년시절 쓰러져 가는 나라를 세워야 한다는 애국심(愛國心)에 불타 기미년(己未年) 3.1운동에 참여(參與)한 후 항일독립운동가(抗日獨立運動家)로 활동(活動)하다가 해방(解放)을 맞고 1971년 별세(別世)하셨다. 公은 충북도지사(忠北道知事)를 지내신 영(營)씨의 막내동생이시다.
부인(婦人) 나주 채씨(羅州 蔡氏)와의 사이에 1女 만을 두시니 해주인(海州人) 오 현태(吳 鉉泰)이다.

독립운동가7 찬

公은 세보상(世譜上) 31世이시며 대사성 병편(大司成 丙編)에 속하신다.1912년 9월16일 아버지 표(杓)씨와 어머니 한양 조씨(漢陽 趙氏) 사이의 5男 3女 中 차남(次男)으로 출생(出生)하였으나 장형(長兄 : 맏형) 현(炫)씨가 큰아버지에게 입양(入養)되므로 사실상(事實上) 장남(長男)이 되었다.
일본(日本) 입명관대학(立命館大學)을 졸업(卒業)하고 일찍부터 일제(日制)의 만행(蠻行)에 저항(抵抗)하여 항일투쟁(抗日鬪爭)에 투신(投身)하였으며 1942年에는 동아연맹(東亞連盟) 항일운동(抗日運動)으로 투옥(投獄)되어 옥고(獄苦)를 치르다가 조국(祖國)의 해방(解放)과 함께 출옥(出獄)하여 정부수립(政府樹立) 후에는 서울시 관재국장을 역임(歷任)하였다. 부인(婦人) 밀양 손씨(密陽 孫氏)와의 사이에 2男과 1女를 두시니 長男은 역곡(驛谷 : 부천시) 南宮病院長 승(勝)씨이고 次男은 준(遵)씨 1女는 수안인(遂安人) 이 두남(李 斗男)씨이다.

독립운동가8 식(植)

公은 충남 부여군 부여읍 석목리에서 1885년 12월 23일 아버지 낙(洛)씨와 어머니 결성 장씨(結城 張氏)의 3男 1女 중 長男으로 출생(出生)하였다. 字는 훈오(薰五)이시다. 효성(孝誠)이 지극(至極)할 뿐 아니라 리장(里長)으로 20년을 재직(在職)하면서 동민들을 가족(家族)같이 친절(親切)히 보살피고 가난에서 벗어나도록 지도(指導)하며 한편으로는 독립정신(獨立精神)을 고취(鼓吹)시키어 일제(日制)가 침략자(侵略者)임을 주지(周知)시키어 애국애족(愛國愛族)의 길을 선도(先導)하였다. 이에 감동(感動)하여 부여군수(扶餘郡守)로 추대(推戴)하였으나 극구(極口) 사양(辭讓)하여 끝내 응하지 않으셨다.

슬하(膝下)에는 부인(婦人) 김해 김씨(金海 金氏)와의 사이에 2男과 5女를 두시니 長男은 촉(燭)씨, 次男은 동양 의학박사이며 철학가인 상(祥)씨와 5女는 장발인(長髮人) 정 용구(鄭 容九), 임천인(醴泉人) 임 규상(林 奎相), 전의인(全義人) 이 동린(李 東麟), 연일인(延日人) 정 기철(鄭 基喆), 함양인(咸陽人) 박 의식(朴 義植)이다.

세보상(世譜上)으로는 대사성 병편(大司成 丙編)에 속하며 세수는 30세이시다.

독립운동가9 경숙(敬淑)

1911년 2월10일 강원도 홍천군 서면 모곡리에서 아버지 찬(?)님과 어머니 전주 이씨(全州 李氏)의 1男 2女 中 長女로 출생(出生)하여 모곡 보통학교를 거쳐 원산(元山)의 루시여고를 졸업(卒業)하고 1932년 모교(母校)의 교사(敎師)로 부임(赴任)하여 한서(翰西) 남궁 억(南宮 檍) 선생을 도와 일하였다. 그러나 1933년에는 무궁화 사건(事件)에 연루(연루)되어 28명이 투옥(投獄)되고 그 중 12명이 옥고(獄苦)를 함께 치루었다. 이분은 결혼(結婚)한지 얼마되지 않은 1943년에는 포천군 가산면 가산리로 이사(移徙)하여 보통학교 교사(普通學校 敎師)로, 또한 포천군청(抱川郡廳)에 재직(在職)하면서 대한부녀회(大韓婦女會) 포천군 지부장(抱川郡 支部長)을 맡아 여성운동(女性運動)과 사회계몽운동(社會啓蒙運動)을 지도(指導)하였다.

1949년에 가산교회(아버지 남궁 찬 장로가 개척)의 담임 전도사(擔任傳道師)로 부임(赴任)하여 (아버지 소천 직후) 전도(傳導)에 힘쓰며 미군(美軍)의 도움을 받아 교회를 신축(新築)하여 봉헌하고 이어 내촌교회, 포천교회에서 전도사로 시무하다가 향년(享年) 54歲로 너무 빨리 1964년 1월30일 소천(所天)하여 가산면 가산리 614-8에 안장(安葬)하였다.

부군(夫君) 이 원종(李 원종)씨의 슬하(膝下)에는 규철,규열 형제(兄弟)를 두었다. 오빠는 철학박사(哲學博士)인 탁과 여동생 정희(정희)씨는 삼선교회(삼선교회)의 장로이다. 세보상으로 31세 (砥平公.丁編)이다.

독립운동가10 천도교인 큰 욱(旭)과 작은 욱(昱)

욱(旭)씨는 1885년 12월25일 평산군 적암면에서 아버지 약(?)과 어머니 풍천임씨(豊川任氏)의 3男 2女 中 長男으로 출생(出生)하여 청년시절(靑年時節)에 천도교(天道敎)에 입문(入門)하여 33人의 한 사람인 최 린 선생과 함께 항일독립운동(抗日獨立運動)에 참여(參與)하였다. 주로 중국(滿州)과 미국(美國)을 드나들며 활동(活動)하였으며 미국에서 임병직(前 外務長官)과 가까이 지냈다. 국내(國內)에서는 신분(身分)을 숨긱기 위하여 수시(隨詩)로 이사(移徙)하였다.
그로 因하여 가족(家族)들의 생활(生活)은 아주 곤란(困難) 하였다. 신분을 위장(僞裝)하기 위하여 수증기(水蒸氣)로 치료(治療)하는 물리치료기(일제때는 아주 선진적이었다.)와 한약(漢藥)과 홍화가루를 가지고 많은 病을 고쳐 주기도 하였다.그러다가 일제에 의하여 체포되어 1년 6개월의 옥고를 강릉형무소에서 보냈다.일련의 행적으로 보아 만주에 있던 독립군과 미주에 있는 독립운동가들에게 자금을 전달하는 임무를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해방후에는 청우당(靑友黨) 평산군 책으로 건국운동(建國運動)을 하시다 북한 정권에 의해 반동(反動)으로 몰려 투옥(投獄)되기도 하였다.

세보상(世譜上)으로 31 世(延安公派 丙編)에 屬하며 부인(婦人) 달성인(達城人) 서수정씨와 순흥인 안경자씨에서 4男 卽, 長男 두, 次男 홍룡,三男 복, 四男 정과 2女 김덕원과 녹자를 두었으나 아직도 이산(離散)의 아픔을 안고 남북(南北)으로 흩어져 살고있다.

한편 작은 욱(昱)이라는 욱씨는 큰 욱(旭)씨와 함께 황해도(黃海道) 평산(平山)에서 같이 살면서 함께 항일투쟁(抗日鬪爭)을 하였고, 해방후(解放後)에는 청우당 활동(靑友黨 活動)도 함께 한 것으로 알고 있으나 더 이상 자세한 행적(行跡)을 알 수가 없어 마음 아프게 생각한다.

독립운동가11 농촌계몽 운동가 휴(烋)

1883年 6月7日 강화(江華)에서 출생(出生). 字는 경호(耿浩) 號는 녹은(祿隱)이며 아버지 계(棨)님과 어머니 전주 이씨(全州 李氏)의 4男으로 세보상(世譜上)으로는 31世(大司成公,戊編)에 속한다. 아주 가난한 가정(家庭)에서 태어났으나 영특(英特)하시어 학문(學文)에 정진(精進)하여 한학(漢學)에 일가를 이루었으며 효심(孝心) 또한 깊어서 선조(先祖)와 부모공경(父母恭敬)에 지극정성(至極精誠)으로 다하셨다. 일제(日制) 때 8대조(八代祖) 諱 헌(헌)의 묘소(墓所)가 있는 선산(先山)을 공동묘지(共同墓地)로 만들려고 할 때 온갖 방법(方法)을 써서 저지(沮止)하다가 일경(日警)에 연행(連行)되기도 하였으나 끝내 굴하지 않자 결국(結局) 다른 곳으로 옮겨서 정하게 하였다.

국권이 일제에 의하여 유린되니 청년회를 조직하여 금주,금연 운동을 전개하는등 사회운동을 하며 동시에 항일 운동에도 앞장섰다가 일경에게 체포되어 1년간의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8.15 해방후에는 농지개혁으로 강화군 선원면 선행리에 있는 충렬사 위로 밭 4000평과 논 9000평이 농지 분배에 들어가 제향을 모시기 어렵게 되자 중앙 각계 요로에 앞장서서 진정한 나머지 분배에서 제외시키어 향사를 드릴 수 있게 하였다. 이 공을 높이어 충렬사 경내에 유림에서 공적비를 세웠다. 강화 향교의 전교, 충렬사 도유사를 맡아 유림의 지도자로 헌신 하였다.

배우자는 전주 이씨로 슬하에는 3남2녀를 두시었다. 장남은 종친회 이사와 고문을 지낸 채씨,차남 용과 삼남 기 2녀는 이치평과 구성회이다. 특히 공의장형인 황성신문,조선일보의 사장을 지낸 훈(薰)씨이며 조카 시인 벽(壁)이 요절하므로 삼남 기(基)를 양자하여 대를 잇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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